Archive 2000-06-23 벤쳐 이야기 Think about my life

나의 첫출근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수업을 마치고 매일 같이 올라 가던 기숙사를 뒤로 한채 내가 간곳은 강남의 어느 한 사무실... 그 때 당시 다른 사무실을 빌려 쓰던 처지였고 한 칸에 파티션을 해서 우리 공간을 내어 주었던 기억이 있다.

첫출근에.. 어색한 내 책상.. 컴퓨터도 없었지만... 왠지 뿌듯한 그마음..컴퓨터가 한대 고장나 있던 것을 고치려고 낑낑대곤 했었는데....


우러러 보이던 대 선배들은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셨고..나도 그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되리라 생각을 했었다.

나의 첫출근은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또 내가 그 안에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어떤 큰 의미를 주었던거 같다.


대표이사를 하시던 홍철형 -- OUR 미디어 대표이사

숭실대 전자계산학과 박사 과정 이병용 -->  현재 군복무중

민구형-- 게임타임 전체 개발 팀장

성천형 -- 현재 휴처인터넷 인터넷 사업부/ 개발 팀장

그리고 나 .. -- 허접..

이렇게 창업을 했었다.


이렇게 1997년 10월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잠은 침대겸 쇼파에서 4명이 넘게 잤구..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 가던 어느날.. 우리는 중대한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만의 공간을 갖기로.. 이 때부터 우리 OUR Media의 탄생이 시작되는데.. 사무실을 옮겼다.

대방동 어느 주택의 옥탑.. 실평수는 10평 남짓.. 방 하나에 부억하나 욕실하나 이때 우리 멤버로 조인을 한 사람은..

상훈형 -- 현재 OUR Media 연구소 소장

참 내가 존경하는 선배중에 한명이다. 언제나 자기 관리에 뛰어나고 나와 97년 겨울부터 ASP라는 것을 처음하면서.. 델파이등을 하셨던 실력으로 저를 도닥거려주고.. 가르쳐 주신 분이다.


대방동 우리 집은 비극이었다. 아침이면 하수구 냄새가 올라 오고, 주인집 아줌마는 악덕 주인집..

(입에 욕을 물고 산다. 많이 싸웠다. 결국..)


학교에서 여기 까지는 거의 2시간-3시간이 걸린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나 하나 처리해야 했던... 어설프고... 힘들었던..


처음에 나에게 주어진 일은 웹호스팅 사업에 대한 사업 분석과 사업성에 관련된 내용.. 지식도 없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위치에서... 여기 저기 웹호스팅 업체들을 찾아 보면서... CGI가 먼지.... 참.. 고민했던 시절들...


두번째 나에게 주어진 일은 BBS를 하나 만드는 일이었다. 이름은 나와 대표이사님이 지었다. 클럽비젼. 도메인은 내가 정했다. http://cv.co.kr/ 지금도 서비스 중이나 처음 ASP를 배우고 15일 만에 만든 사이트라 열라 허접하다.


작업 스케줄을 잡고, 하나 하나 페이지를 그려가면서.. 홍철이형에게 혼났던 기억들.. 그래도 나의 첫 작품에.. 나의 모든 것을 쏟던 그 시절..

97년 겨울.. 우리는 국내 최초로 자동 홈페이지를 기획하게 되고.. 이에 착수하게 된다.


클럽비젼에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던 사람들도 아마 꽤 있었던것으로 안다. 그 후에 이 컨텐츠는 채널 아이 등등에서 서비스 하면서.. 우리는 자본력의 무서움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기도 하다.


명함.. 내가 태어나서 처음 받았던 나의 명함은.. 참.. 감탄사가 연발.. 정말 그 명함을 보면서 흥분해 있었다 난...


세상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양.. 세상은 그리 쉽지 않음을 몰랐던 나의 어리석었던 시절,.,. 하지만 그랬기에 용감할 수 있었고..

그랬기에 굶으면서 무엇인가 할 수 있었다. 행복했다. 모든 것들이.. 힘들었지만.. 정말 행복했다.


처음으로 민구형과 함께 포장마차에 가서 술을 먹던 기억.. (포장마차 처음가 봤음.. 민구형에게 전나 쿠사리 먹었던 걸루.. 이런곳도 안와 봤냐구..)


나에게 아련하게.. 흘러만 간다... 98년 봄.. 우리는 무엇인가 회사의 돌파구를 찾아야 했고.. 그 때 우리가 생각해 낸 아이템은 인터넷 전자 앨범이었다. CD앨범이 한창 유행을 하고 있었고 CD앨범 시장은 이미 고신 미디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 시절.... 우리는 막무가네로 개발에 들어 갔고..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부딪혀야 했던 사람들은 대학교 졸업준비 위원회의 사람들이었고 나이 많은 형들이 그 사람들에게 굽신거리면서 비위 다 맞추어주고..힘들게 들어 오는 모습을 보면서.. 참~~~ 세상은 이렇구나 생각을 했던 시절이었다.어느날이었다.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고.. 밥도 잘 먹지 않던 그날..홍철이 형(대표)이 눈물을 글썽이며.. 사무실에 들어 왔다. 그 때 시간이 새벽 4시..우리에게 막무가네로 미안하다고 그러는 것이 었다.

접대로 200만원 넘는 돈을 썼다고.. 그럴수 밖에 없었다고.. 요구 하는데.. 안줄 수 없고.. 그 프로젝트를 안따면 우린 먹고 살 수 없지 않냐구..200만원이란돈..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큰 돈은 아니지만.. 그 때 당시는 엄청난 금액이었고... 그 금액이면 우리가 몇개월 먹을 수 있는 쌀과 음식을 살돈이었다. 그렇게 세상을 알았다. 그렇게 사회는 나를 분노케 만들었다. 더러운 세상에 적응하겠다고.. 내가 먼저 더러워지자고 내가 다짐했던..

그런 순간이었기도 하다. 그렇게 난 더러워져 갔던 것이다... 이젠 나의 순수를 찾으려 노력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실수로 인해 수백만원 이상의 손해와 난 일생 일대의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대학 CD납품하기 위해 몇달 동안 만든 우리의 시디를 가지고 대상 학교로 갔다. 멋지게 시연회를 하는 도중..... V3 98에서 무슨 바이러스 비스무리 한것이 뜨는 것이다. 당황한 우리팀은.. "V3와 충돌이 나나 봅니다. V3를 닫으면 괜찮습니다" 그러고 시디 몇천장을 넘기고 돌아 오는 도중 한게임방으로 들어가 바이러스 검사를 했다. 이런.. 실행 화일에 CIH바이러스가 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우리는....어찌할줄 몰랐다.

바쁜 일정속에 작업을 진행하느라 최종 마스터시디를 바이러스 검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예전 Adobe사도 그랬던 사례가 있지만.... 우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그 시디들을 받아와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서울로 올라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만약 그대로 둘 경우 학교 전산망에 CIH가 유포되어 복구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그 비용이 더 만만치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학교로 들어가 사실을 설명하고 (엄청 창피하구 그 치욕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다시 시디를 가지고 돌아 왔다.

시디 몇천장의 비용과 학교측에서 요구한 위약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날에 난 인생 일대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얻었던 시점이고 또 일생 일대의 지울 수 없는 치욕의 순간이었다.


갑자기 프로젝트 마감 1주일을 앞둔 지금 이시점.. IIS보안 버그가 발생한 지금시점에서 또 이런 생각들이 나를 더 보안에 신경쓰려 하는 생각이 든다. 대방동 있을때 가장 추억도 많았구 젤루 많이 힘들었고.. 우리가 회사를 꾸리기 위한 준비를 한곳 같다.. 대방동.. 옥탑 전세를 얻었다. 아침이면 물새구.. 하수구에는 악취.. 방은 책상 5개가 겨우 들어 가는 방 하나와 싱크대가 있는 주방하나... 화장실... 거기서 우린 미래를 향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우리가 최고고 우리가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것 처럼.. 지금 그렇게 한다면 아마 난 더 발전해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의 자태를 보아 하면..
1. 악질 집주인( 입에 욕을 물고 사는 할머니와 그 딸.. 그 딸의 동생은 조폭처럼 생겨씀)
2. 저녁 9시가 넘어도 주차 딱지를 띄는 공무원들(바퀴가 주차 선 밖으로 조금 나왔다고
3일 연속 딱지를 땜.. 3일 만에 나와 보니 딱지가 3개.. 휴~~ 짜증..)

3.전기세 한달에 20마넌..(우리가 많이 쓴다고 20마넌을 매월 내란다,. 쩝~.. 휴~~)


머 등등 우리에겐 최악이었다. 그래도 우리의 아이템 생산소 였던 그곳의 기억이 아직도 새록 새록 난다. 상 한번 없이 바닥에 신문지 깔고 김치에 고추장에 밥 먹던 그 시절.. 밤에 자다가 방바닥 뜨거워 인간구이 할뻔 했던 시간들.. 하수구 냄새에 질실사 할뻔 했던 그런 시간들이 97년 10월부터 98년 3월 까지 우리와 함께 했었다.


난 비극이라 제목에 썼지만.. 비극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밑바닥 부터 차근 차근 쌓아온 나의 경력이라 말하고 싶다. 또 나의 추억이라하고 싶다. 이 추억.. 지금 겪으라 하면.. 과연 난 다시 겪을 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 본다.. 답은 나오지 않는다...

........

대방동 사건이 터지고 난 후... 우리는 여의도로 회사를 옮기기로 마음 먹었다. 정들었던 옥탑방..~~~ 옮긴 곳은 순복음 교회 옆 한서 빌딩이라고 하는 오피스텔이었다. 그리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우리에게 옥탑을 벗어날 수 있다는 그 것 하나만으로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한강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매일 매일 저녁이 되고 밤이 되면.. 불꺼진 사무실에 혼자 앉아 일을 했다. 그러다 밖을 쳐다 보면.. 별대신 보이는 무수한 가로등 사이로 나도 빨려가곤 하는 착각을 느끼게 하곤했고... 앞으로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등처럼 밝게 빛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던 곳.... 그곳... 어느날...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난 사무실에 홀로 앉아..  일을 하다가... 우연히... 퇴근한 형 책상에 놓인 담배갑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나이 21살이었나? 두려움 반 호기심 반 태어나서 처음으로 담배를 피워보기로 마음 먹고 함모금 빨고 ㅡ.ㅡ; 자 버렸다. 그때 담배를 피던 날의 나의 심정은..... 죽고만 싶었다.학교 학과일... 그리고 동아리 일...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후배..그리고 회사일... 어떤 일도 열중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나는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었는데 .. 그게 담배가 될 줄이야... 이제는 담배 없이 못 살 정도는 아니지만.. 끽연가에 속할 정도로 담배를 즐긴다. 내 인생에 얼마나 반려자가 될진 아직도 모르겠지만.. 담배보다 더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담배는 내 인생의 한켠에 어려움을 같이 했던 친구로 기억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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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금의 모습이 있게 해준 과거이기에 더 소중하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하면 자신이 없는 한없이 그립지만 한없이 힘들었던 그때 그 모습의 이야기들이 남아 있어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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